프리다 칼로, 그녀의 유품들

2015. 5. 14. 21:03미술세계/아티스트

 

 

프리다 칼로, 그녀의 유품들

 

 

 

 

 

 

 

 

프리다 칼로, 그녀의 유품들을 통해 조명해 보는 그녀의 스타일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비운의 여류화가'라는 타이틀을

늘 달고 다니는 프리다 칼로, 그녀의 비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리다 칼로는 오래전부터 비범한 사람으로 유명했다는 것이 일본

사진가 이시우치 미야코(Ishiuchi Miyako)의 주장이다. 그녀의 그림부터

사랑 이야기, 이국적인 반려동물들, 인상적인 눈썹까지, 칼로의 인생에는

남다른 요소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녀의 평범한 면을 접했을 때, 저의

상상력은 큰 자극과 영감을 받았어요." 이시우치 미야코의 설명이다.

 

 

 

 

 

 

이시우치가 '평범하다'고 한 것은 이 엄청나게 유명한 화가의 삶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면을 뜻한다. 프리다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 삶의 중요한 부분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소아마비로 고생했던 어두운

어린 시절, 18세 때 당했던 끔찍한 교통사고,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쉽지

않았던 결혼 생활, 그녀의 그림에 계속 등장한 세 번의 유산.....

 

 

 

 

 

 

프리다 칼로의 신화중 더 흥미롭고, 파멸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부분들이

지루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다른 부분들을 가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칼로의 일상은 아이콘 뒤에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시우치는 칼로의 평범함에 익숙하다. 트라우마가 담긴 전후 일본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주로 찍어온 이시우치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칼로의 유품을 마음껏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칼로 사후 거의 60년이 지났을 때, 칼로 재단이 그녀의 유품을 촬영할

사람으로 이시우치를 선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드레스와 구두, 선글라스들은 칼로가 예전에 살던 멕시코

시티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1957년에 사망했을 때,

그는 자기 아내의 삶이 최소한 15년 동안 라 카사 아술(La Casa Azul, 블루

하우스)에 봉인되길 원했었다. 그 기간은 15년보다 훨씬 길어졌다.

 

 

 

 

 

 

이시우치가 총 300점을 35mm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모으니, 칼로의

존재의 흔적을 육체적으로 생생히 담은 광범위한 기록이 되었다. 이시우치로서는

이 거친 멕시코 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다. 이시우치는 그녀의 물건들,

코르셋과 부츠, 의족과 광택제를 통해 칼로를 알게 되었다. 이런 액세서리들이

이시우치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현재 이시우치가 찍은 칼로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런던 마이클 호픈

갤러리를 통해 이시우치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구두 생김새를 보면

프리다는 자신이 평생 짊어져야 했던 육체적 상처들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상처들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시우치에 따르면 구두뿐 아니라 코르셋도 일종의 자유를 상징한다.

"부드러운 바람이 코르셋을 통해 불고 햇빛이 그 위에 어룽거리며 쏟아질 때면,

몸을 옥죄는 것 같던 코르셋이 숨을 쉬기 시작하고, 해방 앞에 항복합니다.
 

 

 

 

 

 

갤러리 소유주인 마이클 호픈은 이렇게 전했다. "사용하는 색상들이

비슷하다는 점을 빼면, 두 사람은 여러모로 정반대입니다. 이시우치 미야코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반면 프리다는 거의 언제나 자기 자신의 삶을

기록했죠. 이런 대비가 놀라운 작품을 낳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미 칼로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 존재하고, 이 놀라운 작품들은 그 관심에

기반을 둔다. 최근 몇 주 동안 칼로는 예술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악했다. 그녀가

썼던 옛 러브레터의 판매, 뉴욕 갤러리 스록모턴 파인 아트에서 열린 칼로 사진전,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리베라와 칼로의 작품 활동 비교전 소식들이었다. 뉴욕

식물원은 곧 칼로의 블루 하우스를 재현해서 공개할 예정이다.

 

 

 

 

 

 

호픈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 전시를 보며, 그녀가 지금도 뿜어내는 힘에

난 오늘도 놀랍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만난 여성들 중 굉장히

많은 사람이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아요. 모두가 15분 동안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이 세상에서(앤디워홀이 "미래에는 누구든 15분간의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음), 그녀의 용기는 여전히 영감을 줍니다. 프리다는

평생 동안 유명해 지는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었지만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프리다 칼로, 그녀의 삶이 비범했던 것 만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철의 여인,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면서 한 때(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칼로, 그녀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