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자비에 돌란 -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2015. 2. 22. 17:25영화, 미드 추천/스타, 배우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 -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퀘벡 영화 감독 자비에 돌란은 영화 '마미'가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퀘벡 언론인 'TVA Nouvelles'과 인터뷰를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특별하네요. 정말 놀랐습니다. 제 영화가 후보에 오르지 않은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면 이 영화는 대단히 미국적인 시나리오 틀로 구성된 작품이거든요"

 

하지만 많은 프랑스어권 언론들이 이 인터뷰를 기반으로 자비에 돌란이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거나 '모욕당했다'는 표현의 기사들을 내보냈습니다.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

 

 

 

 

* 이 글은 자비에 돌란이 직접 허핑턴포스트 프랑스에 쓴 블로그 글입니다.

 


침묵을 지키라는 신중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내 영화 '마미'가 오스카 외국어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않은데 대한 나의 하찮은 반응을 두고 벌어진 이 서커스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현상에 대해 말한 코멘트를 그대로 믿는 건 꽤 순진한 짓입니다.

그런 말들은 매체가 원하는 방식에 맞춰서 변형, 왜곡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미디어가 말하는 방식, 인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말을 판매하고 상업화하기 위한 방식 말입니다.

정보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상업적인 거래를 통해 구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습에 뿌리 깊이 박힌 이 방식에 저항한다는 것, 근원적인 구조를 공격한다는 건 아마

바보 같은 짓일 겁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당하는 약자가 되기보다는 이에 맞서는 바보가 되어보려고

합니다. '침묵'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 했듯이 '바보들의 미덕'입니다.

 

 다만 저는 미디어에 속한 직업군 전체를 비난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전, 매체 종사자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들의 '스타일'에 대해 비판하고 싶습니다. 저 하나 잘 살아보겠다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니라 '유명인'

이라는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보의 함정에 노출되는 사람 모두를 대신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단숨에 써 내려간다면 더 매력적이겠지만 이렇게 길게 써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그 함정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글도 공개되고 나면 몇몇 특정한 저널리스트들이 자신만의 단어와 방식을 사용해 자기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바꿀지 모르니까요. 어떻든 간에 이슈는 '지성적 게으름의 정도'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누군가 조금 더 지성을 발휘해서 이 글을 마지막까지 읽어낼지 한번 기대해보죠. 일주일 전에 제가

보였던 평범한 반응이 블로그에서 블로그로, 사이트에서 사이트로, 멍청함과 자극적인 문구를 사랑하는

매체들을 통해 전파됐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열하게 여길 것입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대한 사랑이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와서는 더 심각한 매체에서 일했거나, 더 고상한 기사를 썼던 저널리스트들이 뉴스가

아닌 일에 독점욕을 갖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칼럼니스트들이 진짜 뉴스의 깊은 물 속을 탐험하기를

기대하기에 그들이 말하는 '인기 있는 이야기'들을 믿고 신임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일주일에 한 번씩만 '생각'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블로거들처럼, 어쩌면 하찮은

돌덩어리일 지도 모르는 것도 열심히 찾기만 하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금광 탐험가들처럼, 이미

꺼져버렸지만, 열심히 풀무질하면 다시 따뜻해지는 석탄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기사 거리가 없는 메마른 사막에서 탐욕스럽게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는 환상의 오아시스를 발명한

여행자들 같습니다. 그들이 불과 일 분 동안 뚱뚱하고 굳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불안에 떠는 독자들은 물 건너편에서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곤 딩동댕! 구원이 찾아옵니다. 상품은 배송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우리 스스로 배송하는 방법(편집자: SNS를 의미한다)을 찾았습니다. 남은 일은 '보내기'

단추를 누르는 것뿐입니다. 기사를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23단어짜리 제목(검색에 최적화된 긴 제목을 비꼰

내용)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으니까요.

 

SNS에는 실패할 염려가 없는 특정한 계략이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만약 어떤 예술가가 "참여할 기회를

못 얻었다는 것은 배척당했다는 뜻이다"라고 얘기한다면 이 말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합니다. "배척당한 느낌이

든다"고 쓰면 좀 더 희생자인 것처럼 받아들여질 것입니다(그리고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조금 모욕적이다"

라고 쓰는 것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입니다. 그러니 "모욕당했다"라고 써야 합니다.

트위터에 쓸 수 있는 글자 수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제가 감히 SNS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정의하려고 노력하며 이런 저널리즘이 나약하다고 주장하자, 그런

저널리스트 중 하나가 빠른 답변을 올렸습니다. "자비에 돌란이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해석되는 데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혹시나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와 같은 '초 천재'가 자기 영화 '마미'가 개봉하자마자 수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다뤄준 저널리스트들에게 '나약하다'고 깎아내리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영화에 대해 비평을 했던 사람과 저에 대해 인간적인 비난을 한 사람이 같은 저널리스트인 것처럼

혼동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바닥을 찍는 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자극하려는

의도라면 아주 효과적인 말이겠죠.

 

제 견해로는, 이런 타입의 저널리스트들은 체면이 없습니다. 그들은 작품에 대해 비평할 지식도 없고 뉴스를

전할 자격도 없습니다. 저의 반응은 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팩트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팩트에 화장을 하고

살을 찌워서 대충 준비를 시킨 다음 진정한 뉴스에는 단 일 초도 할애하지 않는 대중에게 송고합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거짓 루머를 막을 수가 없어서 고통받는 윌리엄 와일러 영화 '아이의 시간'의 주인공

오드리 헵번과 셜리 매클레인처럼, 갑자기 수백 명의 사람이 우리를 향해 "그만 불평해!", "그 추한 입을 닥쳐!"

라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오직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의 인생을 파헤치고

곡해하는 것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는 당신의 삶을 따라다닙니다. 당신이 뭘 하든지,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레

말을 골라서 할 때면, 너무 아름답게 말하면 '현학적'이라고 깝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잔인하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으로 만드는 영화일지라도 머리를 조금 써서 만들면 허세가 끼어있다고 공격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영화감독들)가 '잘난 척'하고, 뭔가, 혹은 누군가를 항상 '공격한다'고 말하는 교활한 여우들이

있습니다. 지금 야유 속에서 통탄하고 있는 한 감독(자비에 돌란 자신을 의미함)은 '앙팡 테리블'로 인정을 받았어야

했기에 솔직하게 실망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엔 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생소한 게 아닙니다. 제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달려들어 욕을 하며 즐기기에 딱 좋은 소재를

제공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칸 페스티벌의 기자 간담회가 있던 이른 아침 여섯 명의 퀘벡시에서 온 저널리스트들이'로렌스 애니웨이'의 배급사

사무실에 '주목할 만한 시선'에 뽑힌 데 대한 심정 같은 코멘트를 따러 모여 있었습니다.

 

그 전 몇 달간 경쟁부문에 진출할 게 확실하다는 몇몇 주요 매체의 비평을 읽어온 터라 21살 어린 나이의 저는

꽤 기대하고 있었죠. 그러나 경쟁부문 대신 그 아래 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뽑혔고, 저는 퀘벡시에서

온 저널리스트들에게 실망하긴 했지만 '주목할 만한 시선'에 뽑혀서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계속됐지요. 다음날 저널리스트들은 대화를 이런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더군요.

"자비에 돌란은 칸에 간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다". 검정과 흰색으로 쓰인 기사였지만 제 가슴에는 붉은 글자로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칸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나의 분노, 나의 화병, 나의 수치심에 관해 물어보더군요.

전 그 단순한 발언 때문에 생겨난 가상의 스캔들을 부정하느라 끔찍한 일주일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 일에 대해 말하고 씁니다만 그날 아침 저널리스트들에게 제가 진짜로 무슨 말을

했는지 누가 알까요? 아무도 모를 겁니다. 지난주에 일어난 일도 정확하게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두 퀘벡 지역 신문에선 제가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썼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말도 안 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죠. 전부 오보입니다. 전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고 그런 기분을 느낀 적도, 그런 어조나 태도를

보인 적도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같은 반응이 반복되고, 같은 짜증이 일어나고, 같은 불이해가 생겨납니다.

 

이런 허위적인 사실을 지나치게 열심히 퍼뜨린 저널리스트들은 좀 더 깊게 이 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질문을

던질 능력도 없는 걸까요? 그들이 지향하는 커리어는 대체 뭘까요? 그들은 실망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린 경험도 없는

걸까요? 그들은 실패의 경험이 없거나, 굴곡 없는 인생과 찬란한 성공만을 맛본 걸까요? 그들은 절대 걸려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한 밤을 뒤로 또 잠들지 못했던 실망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걸까요?

 

그들은 잘못 인용될까 봐 무서워서 말 한마디 하는 데도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처지를 이해나 할까요? 그들의

야심은 왜 우리를 이토록이나 괴롭힐까요? 난 이 블로그 글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칼을 꽂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몇몇 가십지 기자나 칼럼니스트들과의 친분보다는 상냥함과 진실함이

더 중요합니다.

 

전 제 영화를 통해 사랑받으려는 것이지 저 자신이사랑받기 위해서 감독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오보에도

불구하고 제가 침묵을 지킨다면, 그건 바보 같은 선동과 센세이셔널리즘에 훼손당한 (제가 여전히 존경을 품고 있는)

저널리스트 직군 전체에 대한 모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블로그 글 전체의 내용 중 위 두 문장이 가장 많이 보도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 글의 진정한

의미와 가장 먼 내용이 가장 악의적으로 보도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문이 인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조금도 변형되거나

편집되지 않은 이 블로그 글에 대한 가장 뛰어난 대답은, 아마도 완벽한 침묵일 것입니다. 기묘하게도 말이지요.

 

 

 

 

자비에 돌란 감독 신작 <마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