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 20세기 근대회화의 아버지

2014. 6. 29. 21:10미술세계/아티스트

폴 세잔 - 20세기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

 

 

 

20세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고흐와 고갱이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라면 세잔은 입체주의와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뿌리를 제시하였고, 인상주의 이후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실험의 장을 마련해준 작가이다.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파의 전개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폴 세잔 作 <오베르의 목을 맨 사람의 집> 캔버스에 유채, 50 x 66, 1872-73

 

 

 

그의 작품을 시기적으로 구분해보면 <목맨 사람의 집>이 그의 인상주의 전기작품 중에서 수작으로 꼽히며,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성숙기의 작품으로 그의 강한 건축적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이고,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 빅투아르 산>은 후기 작품으로 대상의 진실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분석과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폴 세잔 作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47 x 56.7, 1895, 오르세미술관

 

 

 

 

폴 세잔 作 <목욕하는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1894-1905

 

 

 

 

폴 세잔 作 <생트 빅투아르 산> 캔버스에 유채, 1900, 에르미타쥐 박물관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세잔은 은행가였던 아버지
루이스 어거스트 세잔(Louis-Auguste Cezanne) 덕에 평생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다.
10살이 되던 무렵 세인트 조셉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세잔은 14살에는 부르봉 학교(College Bourbon)에
들어갔고 여기서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6년여를 보낸 이후 아버지의 바람대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를 했다. 법대를 다니면서도 드로잉 수업을 계속 받아온 세잔은 1861년에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게 된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으나 어머니의 지지와 이미 파리에 살고 있던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굳힐 수가 있었다. 이렇듯 힘들게 미술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폴 세잔 作 <납치> 캔버스에 유채, 1867

 

 


문학, 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1860년대 초 파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매년 열리는
전람회에서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양식을 따르지 않는 그림들을 거절해왔다.
이 때문에 작가들의 반발이 일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洛選)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낙선전(살롱 데 르퓌제, salon de Refus&eacute;s)을 개최하도록 했다. 세잔은 바로 이 낙선전을
통해 처음 전시를 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 작품들이 포함된 낙선전은 가히 혁명적이라 여겨졌으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이었다. 이를 계기로 세잔은 인상주의 작가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무례하고 수줍은 성격 탓에 친밀해지지는 않았다. 이 시기 세잔의 작품은

이전의 수채화나 스케치들과는 매우 다른 양식의 어둡고 무거운 색조가 주를 이룬다.

<옷 입는 여인>, <강간>, <살인자> 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세잔 초기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폴 세잔 作 <현대적인 올랭피아> 캔버스에 유채, 1873-74

 

 

18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양식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세잔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Hortense Fiquet)와 사랑에 빠졌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피사로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배우고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스스로를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다. 그는 인상파에서 주목했던 광선에 관심을 가졌으나,

빛과 명암의 표면적인 분석을 넘어 기본이 되는 형태를 탐구했다. 1877년 제3회 인상파 전시를

고비로 그는 점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이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폴 세잔 作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채, 1890-94, 오르세미술관

 

 


세잔은 1886년 졸라와의 오랜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졸라의 소설 '작품'(1886) 때문인데,
세잔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실패한 천재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바로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완전히 결별했다. 1895년에 세잔은 화상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기획으로 첫 개인전을 열어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말년에 그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 작품에만 몰두했으며,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화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형태는 원기둥과 구, 원뿔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고, 색채와 붓 터치로 입체감과 원근법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으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폴 세잔 作 <사과와 오렌지> 캔버스에 유채, 1895-1900, 오르세미술관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세잔은 1906년 그의 고향에서 숨을 거뒀다.
1907년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세잔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